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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

REVIEW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2. 4. 17. 15:57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소 파격적인 제목에 이끌려 아무런 정보 없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3분의 1 정도 읽었을 때 이 책의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았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여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상이 있다. 나는 이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을 생각해냈다.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우리가 이름 붙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건져 올린 물고기의 학명을 짓기 전에는 사실상 인간의 세계에 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예상했다. 책을 덮을 시점에는 거의 틀린 추측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분류학자의 생애를 파헤치는 저자 룰루 밀러의 회고록이다. 책은 데이비드의 삶과 저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쓰인 탓에 나는 이 책의 분류가 소설인지 아닌지 헷갈렸었다. 데이비드는 분류학자로서 수십 년에 걸쳐 어류 표본을 수집해 이름을 새겼다. 그리고 지진이 그의 업적을 앗아갔는데, 유리단지에 넣어둔 주석 이름표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깨지고 흩어져버렸다. 그런 혼란 사이에서 데이비드는 절망하는 대신 바늘로 물고기의 몸체에 직접 이름표를 꿰매 붙였다. 이 행동에서 저자는 그의 삶을 통해 시련에도 멈춰 서지 않고 분류를 계속할 수 있었던 무언가를 찾고 싶어 했다. 이 무정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어떠한 처방을.

 

그것은 자기기만이었다. 혹은 긍정적인 착각.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사람보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 데이비드 스타 조던 역시 긍정적인 환상을 두르고 살았기 때문에 계속되는 삶의 비극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데이비드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대학 학장으로 지내며 직원 임용에서 지원서를 읽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 지인들을 고용하고, 아끼는 동료의 불륜을 덮어주는 등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데이비드가 정말로 존경받을 만하고 본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이러한 불편함을 가진 채로 중후반부의 책장을 넘길 때 굉장히 충격적인 내용이 전개되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우생학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종의 형질을 인위적으로 육종하여 우수한 종을 만들려는 학문이다. 겉으로만 보면 그럴듯하지만 실은 교육을 부정하고 오로지 유전적으로 부적합자를 걸러내는데, 그들의 열등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생의 대부분을 식물과 어류를 분류하는 데 몰두했던 데이비드는 인간 역시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백인은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며, 열등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무시한다. 이 분류과정의 기저에는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그의 지독한 자기 확신과 기만이 있었을 것이다. 우생학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부적합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강제로 불임화했다는 대목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차라리 잘 쓰인 허구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공공복지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을 불임화하는 것이 합법화의 반열에 올랐었다니. 나치와 다르지 않은 일들이 미국 사회에서도 국가 정책으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어류분류학자의 대표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눈을 감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내가 인식론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던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류도, 포유류도, 양서류도 존재하지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물고기라고 묶어 불렀던 것들은 사실 서로 아주 다른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진화적인 관계에서 어류를 한 범주로 묶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소와 연어와 폐어, 이 셋 중에서 둘과 다른 하나를 고르라면 보통은 소를 골라내겠지만, 실은 폐와 후두개의 유무로 따지면, 연어가 나머지 둘과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연에 질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질서라고 생각한 것은 그저 인류가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지 사실이 아니며, 이 우주 안에는 혼돈만이 꿈틀대는 게 아닐까?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1997년의 SF영화 가타카에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빈센트에게는 지구 밖으로 나가는 꿈이 있었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유전적으로 부적격자로 판명된 하층계급이었기 때문에 우주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가졌던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정상성에 대한 잘못된 신념-우생학으로 이어졌듯이 빈센트가 태어난 세상에는 이미 사다리가 정착된 상태였다. 그러나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우주 비행사로 선발되고, 영화의 막바지에서 그는 우주선에 오르는 것으로 꿈을 이룬다. 영화 내내 빈센트는 운명을 결정할 유전자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비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류의 분류체계가 정확하지 않아 그 어떤 것이든 어류가 될 수 있다는 역설처럼 확신할 수 없기에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에는 한낱 잡초로 보이는 민들레가 약초 채집가에게는 약재로, 화가에게는 염료로, 벌에게는 침대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물고기의 사망선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인류가 만들어 낸 범주의 모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과거에는 천동설이 보편적인 진리였음에도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언제든 이상해 보이는 새로운 진실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자연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넓어진다.

 

분명히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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